가난의 부족


 
"부족한 건 부가 아니라 가난일는지도 모른다"

자유와 행복에 꼭 필요한 가난이 부족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보다 훨씬 더
근본적으로 말해야 한다.

두가지 점에서. 첫째, 부도 조금 있고, 게다가 비움의 정신도 조금 있고,
그러면 더욱 좋다, 이런 식의 관점을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겹도록 해 온 말이지만, 오히려 우리는 비울 때에만 풍요, 라는 관점을 꽉 
붙들어야 하리라. 이런 관점만이 "자발적 가난"의 "자발적"을 완성할 수 있다. 
역시 반복해온 말이지만, 나는 본디 "가난"이라는 말이 보편적 이상 가치가
될 수 없다 생각하므로, 이 말을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뜻만은 존중한다. 시대가 부추기는 대로의 욕망의 전개가 아니라
욕망의 비움이라는 역방향으로 갈 때에만 참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 꼭 이 시대가 자본이 마몬이 되는 시대여서
그런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 행동은 오직 "필요"에 의해서만 추동된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그러한   
통찰이 시대와 무관한 본연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지금 없다" 
"지금 필요하다" "나는 없는 그것을 원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행위의 근본 
지지대이므로, 나아가 적절한 제어 장치가 없는 한, 이 "원함"의 기계는 작동을
멈추지 않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욕망의 비움"이라는 역방향으로의 움직임이
우리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비단 "물질"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과 지식을
한정없이 추구해가는 것 역시 물질의 추구처럼 삶을 피폐하고, 노곤하고,
무겁고, 거칠게 만든다. 가볍고, 부드럽고, 윤택하고, 싱그럽고, 건건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려는이는 "비움"이라는 것의 가치를 정말이지 심도 있게
생각해봐야 한다. 

둘째, "아우성"에 묻어 있는 부의 추구, 혹은 물질에의 긍정, 물질 추구 욕망의 
긍정이, 이 시대의 문맥에서는, 반드시 타자의 생명 파괴를 동반한다는 점이
저 글에서는 지적되지 못했다.

유기농 식품이나 친환경이 부자의 정신적 물질적 악세사리 정도가 되는 사회에서
내가 하수도로 내보내는 화학물질이, 소각장으로 내보내는 "뵈기 싫은 것들"이,
내가 전기를 켤 때, 차를 탈 때 공기 중에 내보내고 마는 것들이, 내 주위의 생태계
파괴를 어떻게 촉진하는지 성찰해볼 것을 권유하는 것은 소용에 닿지 않는 일일는
지도 모르지.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욕망의 가감없는 추구가 욕망의 임자 한 사람의 개인적 삶
만을 피폐화시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이를 둘러싼 숱한 생명체들의 삶
역시 파괴하고 마는 시대에, 그것이 명명백백히 사실로서 드러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런 시대에서, 욕망의 추구에서 욕망의 비움이라는 역방향으로의
운전은 그러한 운전을 선택한 이 개인의 삶의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란 있는가. 이것은 불교적 차원의 질문이 아니다. 홀로 독립되어 생명체로서 
활동할 수 있는 나란 생태과학적으로, 동시에 존재론적으로 오류의 개념이다.
 
'나'란 늘 타 생명체와 함께 있는 나요, 숱한 생명체의 공동 살림, 공동 거주를
증거하는 장소다. 생태 환경이 아닌 몸은 이 세계에 없다.

그런 점에서 내 행동이 내 주위 생태환경을 파괴한다는 것을 버젓하게 알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적극적 무지 혹은 지식의 변형을 내 욕망의 운전을 위해 사람들이 포용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 내가 의심하는 바다.
 
아픈 사람에겐 의사의 통보는 늘 '불편한 진실'이다.
그러나 앎 없이 치유는 없다.

by 소서재인 | 2009/03/14 06:59 | 삶의 독서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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